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 (문단 편집) === 냉전시대(1950년~1990년대) 복무자들 === 그린베레의 경우 50~80년대 냉전시대 복무자들 중에 유명한 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따로 언급한다. 이들 중 몇명은 1977년 [[델타 포스]] 창설 주역들이었기에 [[델타 포스]] 문서의 출신 인물 항목과 겹치는 사람도 몇 명 있다. * 아론 뱅크 - 리조트에서 라이프 가드로 일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1942년 8월에 39세의 나이로 육군에 입대, [[OSS|전략 사무국(OSS -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배치됨.[* 입대 당시 나이가 39살이었지만 라이프가드 출신답게 운동 능력이 상당했다고 함.] 1944년 6월에 [[프랑스]]로 공수 침투해서 [[레지스탕스]]들과 함께 사보타지 게릴라전 수행. 같은 해 8월, 연합군 프랑스 남부해안 상륙작전(작전명 'Dragoon') 당시 프랑스 [[빨치산]]들과 함께 남부지역 해안 도시에 먼저 침투해서 정규군 상륙전에 도시들을 해방시킴. 1944년 후반부터 45년 초에는 작전명 '아이언 크로스'라는 작전을 지휘함. 이작전은 독일군 전쟁포로, 탈영병,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모아 [[OSS]]와 합동 특수작전부대를 편성해서 공수훈련과 친위대 군복을 입고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선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체포하는 작전이었음. 1945년 독일이 항복하자 [[OSS]]의 아론 뱅크는 아시아 인도차이나로 가서 [[베트남]]의 [[호치민]]과 만나 [[일본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이끌었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역시나 같은 [[OSS]] 출신으로 필리핀에서 게릴라전을 이끌었던 러셀 볼크만 대령과 함께 특전단 창설을 주도함. 당시 [[소련]]에 점령당한 동유럽 국가에 침투하여 공산주의 '[[철의 장막]]' 뒤에서 반소련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음. 1952년 그린베레 제10특전단이 최초로 창설되어 아론 뱅크가 초대 특전단장을 맡았고 1958년에 대령으로 군에서 은퇴하였음. [[파일:3cb-b155d721137-resize-750.jpeg.jpg]] 아론 뱅크 대령의 사진 * 윌리엄 P. 야보로 - 그린베레의 대부. 1936년 [[미국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제57보병연대([[필리핀]] 주둔), 제4사단 제29보병연대에서 복무. 이후 미 육군의 초기 공수부대 창설에 참여해서 [[제101공수사단]]의 제501공수연대에서 복무함.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1942년 '파라트룹 태스크 포스'의 일원으로 북아프리카 [[알제리]], [[튀니지]]에서 작전 수행. 1943년부터는 [[제82공수사단]]의 제504공수연대 제2대대장(중령)으로 이탈리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시칠리아 섬 침공작전]]에 참가. 이후 제509공수대대장을 맡아 1944년 1월에 이탈리아 [[안치오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이때 [[제75레인저연대#s3.1-제1레인저대대]]와 함께 선봉으로 침투해서 상륙지역 정찰작전 수행. 같은 해 8월에 연합군 프랑스 남부 상륙작전(작전명 'Dragoon')에서 공수부대 병력들이 선봉으로 공수하여 남부 산악지역을 장악하는데 그의 부대도 참가함. 1945년부터는 제92보병사단의 제473보병연대장(대령)으로 [[이탈리아 전선#s-2|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 종전 이후에도 유럽에 남아 미 제15군단의 헌병대장,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군 합동 헌병대를 창설함.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미국 본토의 교육사령부에서 근무, 1950년에는 [[영국]]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미 군사고문단 파견, 1952년에는 미 육군 전쟁 대학에 다니다가 1956년에는 [[캄보디아]]에 군사고문단으로 파견, 1958년에는 [[서독]]에 위치한 제66방첩국 대장을 맡음.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미 육군특수전학교의 교장을 맡아 이 시절에 특수전 교육을 정립하고 4개의 새로운 특전단을 신설하였으며, [[존 F.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초록색베레모(그린베레)를 특전단의 공식 상징으로 자리잡게 함. 1965년 [[공동경비구역|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전회담 당시 유엔군, 한국군 측 대표로 참석하여 협상을 벌였고 마오쩌둥 문선 및 주체사상까지 공부해서 북한 측 대표들을 거의 정신 나가기 직전까지 놀려먹으면서 괴롭혔다.[* 약간만 소개하자면 김일성 가짜설로 공격하는가 하면 노획된 북한 간첩선들에 김일성호로 이름 붙여서 자유의 집에 전시하는가 하면 니가 하는 소리는 미국의 소리 재탕에 불과하다! 라고 반격하는 북측 대표들에게 엌ㅋㅋ 님들도 자유의 방송 청취자? 반동 새끼네! 라고 역공격하고 아예 대놓고 탈북도 종용했다.] 그가 교체된 이후에도 북측 수석대표들이 두고두고 야보로를 욕했을 정도였다. 이후에는 [[펜타곤]]에서 특수전, 심리전 참모, 몇년 뒤에는 육군 정보 참모부장 역임. 1968년에는 한국 주둔 제1군단장을, 1969년에는 미 태평양 육군 사령부 참모장과 부사령관 역임하고 1971년이 중장 계급으로 퇴역하였음. 영국 [[SAS(특수부대)|SAS]]의 명예 대원이었으며, 2012년에 그(야보로 중장)와 [[존 F.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동상이 JFK육군특수전학교에 세워짐. [[파일:general_7556h_10.jpg]] 야보로 준장 시절의 사진 [[파일:general_y46367rough_7.jpg]] 미 특수전 박물관에 있는 야보로 중장의 흉상[* JFK육군특수전학교에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서있는 동상은 따로 있다.] * 아서 D. 시몬스 - 미주리대학교 ROTC 출신으로 1941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제98야전포병대대에 배치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태평양 전쟁|태평양 전선]] 뉴기니에 배치됨. 이후 [[제75레인저연대#s-3.1|제6레인저대대]]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태평양 전선]] 각지에서 활약. 카나바투안 포로수용소 구출작전에 참가하여 은성훈장을 받았고 전쟁이 끝나고 소령계급으로 퇴역함. 1951년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서 [[레인저 스쿨|레인저]] 교관, [[터키]] 군사고문단, 미 육군 제18공수군단에서 근무하다가 1958년 그린베레 제7특전단에 배치됨. 1960년에는 육군 특수전학교에서 근무하였고 1961년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1962년까지 내전 중이던 [[라오스]]에 파병되어 특전단 작전팀 지휘.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파나마]]에 신설된 제8특전단의 첫 특전단장 역임. 이후 [[MACV-SOG]]에 소속되어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 1970년에는 손타이 포로수용소 구출작전을 총 지휘하였음. 이 공로로 백악관에서 [[리처드 닉슨|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수훈십자장]][* 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음. 1971년에 대령 계급으로 은퇴함. 1978년에 [[이란]]에 인질로 붙잡힌 미국인 회사 직원 2명을 구출하는 작전을 조직하여 석방시키기도 하였음.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 날 JFK미육군특수전학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음. [[파일:Sres-e1280385936.jpg]] 시몬스 대령의 사진 [[파일:sta364774te_8.jpg]] JFK육군특수전학교에 세워진 시몬스 대령의 동상 * [[델타 포스#s-4.1|찰스 앨빈 베크위스]] - 유명한 그린베레 장교이자 대테러부대인 [[델타 포스]]의 창설자. [[델타 포스#s-4.1|찰스 앨빈 베크위스]] 부분 참조. [[파일:Charles_Beckwi263637th.jpg]] [[델타 포스#s-4.1|찰스 앨빈 베크위스]] 대령의 사진 * 리처드 J. 메도우스 - 1947년 15살에 육군에 입대해서 제187공수연대 소속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 1953년에 그린베레에 지원해서 제77특전단[* 오늘 날 제7특전단의 전신.]과 제10특전단에서 복무. 1960년대 초반에 영국 [[SAS(특수부대)|SAS]]에 교환 장교로 파견되어 [[영국]]과 [[오만]]에서 [[SAS(특수부대)|SAS]]와 함께 복무함. 이후에 다시 제7특전단으로 돌아와서 [[라오스]]에 전투파병을 다녀옴. 이후 [[파나마]]에 제8특전단이 새롭게 창설되는걸 도와주게 되고 1965년부터는 [[MACV-SOG]]에 소속되어 [[베트남 전쟁|베트남]]에 2차례 파병을 다녀오게 됨. 북베트남 지역에서 벌어졌던 그 유명한 손타이 포로수용소 구출작전에도 지휘관으로 참가했었음. 이후 [[레인저 스쿨|레인저]] 훈련사령부에서도 근무하다가 1977년에 소령으로 퇴역함. 퇴역이후에도 민간 계약자 신분으로 고용되어 1977년 [[델타 포스]] 창설에 기여하였고 1980년 [[독수리 발톱 작전|이란 대사관 인질구출작전]]에도 역시 민간 계약자 신분으로 참가함. [[파일:mead37377ows.jpg]] 메도우스 소령의 모습.[* 스페셜포스(Special Force) 탭은 1980년대에 가서야 생긴 것임.] * 빌리 워프 - 1948년에 육군에 입대해서 [[제82공수사단]]에 배치. [[6.25 전쟁|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11공수사단의 제187공수연대로 옮겨가서 [[6.25 전쟁|한국 전쟁]]에 참전. 전쟁이 끝난 후 [[서독]]에 주둔한 미 육군 제5보병사단에서 복무. 이때 그린베레에 지원하여 1958년에 [[서독]]에 위치한 제10특전단에 배치. 1961년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남베트남에서 특수작전부대인 'CIDGs'[* Civilian Irregular Defence Groups. [[미국 중앙정보국|CIA]]와 그린베레가 시행한 [[블랙 옵스|흑색작전]]의 일환으로 남베트남 민간인들을 비정규 게릴라 대원으로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에서 활동하였고 [[라오스]]에서도 작전 수행. 이후 계속 파병을 반복하였는데, 1965년 어느날에 그의 부대는 습격작전을 수행하다가 4,000명이 넘는 [[베트남군|북베트남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중공군]]을 맞딱뜨리게 됨. 후퇴하는 도중에 빌리 워프는 다리에 총상, 머리에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채 쓰러지게 되고 북베트남 병사도 그가 죽은줄 알고 그냥 내버려 둠. 결국 동료들에게 구출되었고 병원에서 회복한 뒤 1965년 12월에 제7특전단으로 다시 복귀함. 그해(1966)에 또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고, Masher 작전에서의 무공으로 은성훈장과 퍼플하트(그에게는 6번째 였다.)를 받음. 이 시기에 그는 [[MACV-SOG]]의 CCN(북부 관할)에 소속되어 남베트남 특수부대와 캄보디아 병력과 함께 많은 게릴라전을 수행함. [[MACV-SOG]]에서 그는 원사 계급으로 최고참이었으며, 1970년에 군 역사상 처음으로 컴뱃 HALO 점프를 성공하기도 하였음. 그리고 1971년 6월 22일에 북베트남군 점령지역에 대한 마지막 HALO 점프도 성공하여 특수 정찰작전을 수행하였음. 무려 7년 6개월동안 [[베트남 전쟁|베트남]]에 파병되어 있었던 그는 1971년에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제10특전단에 있다가 1972년 2월 1일에 원사 계급으로 은퇴함. 은퇴 이후 [[미국우정공사|우정공사]]에서 일하다가 1977년에 [[미국 중앙정보국|중앙정보국(CIA)]]으로 부터 연락을 받고 [[리비아]]에 가서 [[블랙 옵스|흑색작전]]을 수행함. 80년대에는 귀국해서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1992년에 다시 [[미국 중앙정보국|중앙정보국(CIA)]]의 연락을 받고 아프리카 [[수단 공화국|수단]]에 파견되어 비밀작전 수행. 여기서 그는 카를로스 자칼, [[오사마 빈 라덴]]을 감시함.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고 그는 전직 특수부대 출신 용병들을 모아 [[CIA SAD|CIA 특수활동부(CIA-SAD)]]와 그린베레 제5특전단 소속 작전팀과 함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 북부 산악지대에서 활약함. 이때가 무려 72세 였음. [[파일:14d67e418e3dc8d142625bd0.jpg]]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 중인 72세의 빌리 워프 * 존 R. 카바이아니 - 1969년에 육군에 입대하였고 이듬해인 1970년 그린베레 제5특전단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됨. 1971년 6월 4일, 당시 [[MACV-SOG]] 소속으로 활동하던 그의 부대는 작전 도중 적군의 집중 공격을 받음. 카바이아니 하사(당시 계급)는 부대원들이 모두 헬기로 퇴출할 때 까지 혼자 남아서 엄호사격을 하였고 결국 북베트남군에게 생포당해 2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지내게 됨. 1973년 3월에 협정을 통해 석방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 12월 12일에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서 [[명예 훈장|메달 오브 아너(명예훈장)]]을 받음. 이후에도 [[중동]], [[남미]], [[유럽]], [[동남아시아]]에 파병되어 복무함. 1980년부터 1983년까지는 [[서독]]에 주둔한 제10특전단에서 복무하였고, 1983년부터 1984년 여름까지는 제11특전단에서 복무함.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델타 포스]]에서 주임원사로 복무하다가 1990년에 은퇴함. 전세계 각지에서 free fall 과 static line 점프를 5,000회 이상이나 한 점프마스터 였음. [[파일:d58b7adb6eba2dd3df196184a74.jpg]] 카바이아니 하사(당시)의 [[명예 훈장]] 수여 장면 * 월터 L. 슈메이트 - 1952년에 미 육군에 입대하여 제11공수사단의 제187공수연대에 배치되어 [[6.25 전쟁|한국전쟁]]에 참전. 이후에는 제11공수사단의 패스파인더 소대(Platoon)와 공수/점프 마스터 교관으로 근무. 그리고 이어서 [[제82공수사단]]의 제504공수연대에서 분대장으로 복무. 1962년 1월에 그린베레에 지원하여 선발과정인 Q코스를 통과하고 제1특전단의 [[일본]] 오키나와 주둔 부대에 배치되었고, 1964년까지 제1특전단에서 복무하며 [[베트남 전쟁]]에 2차례 전투파병을 다녀옴. 제1특전단에서 복무하던 시절인 1963년에 [[네이비 씰|미 해군 수중폭파대(UDT)]]로 가서 스쿠버 다이버 교육을 받고 왔으며, 1964년에는 JFK육군특수전학교에서 고공교육(HALO)까지 받음. 1964년에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래그의 제7특전단으로 옮겼다가 얼마뒤 같은 곳에 위치한 JFK육군특수전학교의 특수전교육단(Special Warfare Training Group)에서 교관으로 근무. 이 시기에 그는 해군과의 협력을 통해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해군잠수학교에 육군 특수부대 컴뱃 스쿠버 다이버 교육과정을 만들게 됨. 그후 1966년에 다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델타포스#s-4.1|찰스 베크위스 대령]] 휘하의 '프로젝트 델타'에서 정찰팀장으로 활약. 1967년에 파병에서 돌아와 그린베레의 고공교육(HALO) 교관으로 2년간 근무. 1969년에는 특전단 제46[[태국]]파견대에서 근무하며 스쿠버 교육을 담당하였고, 이듬해인 1970년에는 다시 특수전교육단 교관으로 돌아와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해군잠수학교에 그린베레 전용 컴뱃 스쿠버 다이버 교육장 시설을 만들었음. 1971년에 다시 [[베트남 전쟁|베트남]]에 파병되어 [[MACV-SOG]] 중부관할(CCC)에 1년간 소속되어 활약. 1972년부터는 다시 제1특전단의 [[일본]] 오키나와 주둔부대에 배치되었고 여기서 그는 스쿠버팀에 소속되어 오키나와 1특전단 부대내에서 자체적으로 스쿠버 교육을 실시함. 1974년에는 다시 제7특전단으로 돌아와서 복무했고 이때 계급이 육군 원사(SGM) 였음. 1977년에 [[델타포스#s-4.1|찰스 베크위스 대령]]이 [[델타 포스]]를 만들때 초기 창설멤버 중 한명으로 참여하였고 [[델타 포스]] OTC 선발훈련 교관을 맡음. 1979년 [[독수리 발톱 작전|이란 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에도 참가하였고 1982년도까지 [[델타 포스]]에서 복무하다가 육군에서 은퇴. 은퇴한 뒤에도 민간인 신분으로 [[델타 포스]]에서 1993년까지 계속 근무하였으며, 그가 사망한 다음해인 1994년에 육군 특수부대 컴뱃 스쿠버 다이버 학교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기념타워를 건립하였음. 참고로 그의 아들인 앨런 슈메이트는 1989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82공수사단]], [[제75레인저연대]], [[제2보병사단(미국)|제2보병사단(한국주둔)]]을 거쳐서 1997년부터 그린베레 장교로 제7특전단에서 2006년까지 복무하였고 이후에도 [[미합중국 육군특수작전사령부|육군특수작전사령부(USASOC)]]와 [[미합중국 합동특수작전사령부|합동특수작전사령부(JSOC)]]에서 계속 복무하다가 2012년에 대령계급으로 전역함.(당연히 특전단 컴뱃 스쿠버 교육 이수자임.) [[파일:18b__copy_3_1_1.jpeg.jpg]] 1963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월터 슈메이트 * 릭 램 -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후 1978년에 만18살의 나이로 육군에 입대하여 [[제75레인저연대]] 1대대에 배치됨. 레인저 시절 1980년에 있었던 [[독수리 발톱 작전|이란 대사관 인질구출작전]]에 참가함. 1984년부터는 한국의 [[공동경비구역|판문점 JSA]]에 위치한 UN군 사령부 지원단에서 근무하게됨. 이때 계급이 하사였음. 1984년 [[판문점 총격사건]] 당시 그는 미군 신속대응병력 소대를 이끌고 [[비무장지대|DMZ]]에서 40여명의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수명을 사살함. 이 무공으로 그는 은성훈장과 미 육군 전투보병휘장을 받게 됨. 이후에 그는 그린베레에 지원하여 제7특전단에서 복무하게됨. 제7특전단 시절 1989년 [[파나마 침공]]작전에 참가하였고, 그의 작전팀은 188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군사구역 한 곳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냄. 또 그는 4명의 그린베레로 이루어진 공격팀을 이끌며 파나마 국립 라디오 방송국으로 침투하여 안테나와 트랜스미터기를 파괴하였고 이 무공으로 동성훈장을 받음. 이때 계급이 중사였음. [[파나마 침공]]작전 이후에 그는 육군 그린베레에서 [[제75레인저연대]] 3대대로 다시 발령이 나는데, 그린베레에서 다시 [[제75레인저연대|레인저]]로 간 사례는 미 육군 역사상 그가 처음이었다고 함.[* 원래는 불가능한데 릭 램과 평소에 친했던 육군 중장이 특별 명령으로 가능하게 해줬다고 한다. 75레인저연대에서 복무하다가 그린베레로 넘어간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그린베레에서 복무하던 부사관 계급이 다시 제75레인저연대로 들어가는 것은 인사발령이 거부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93년 [[모가디슈 전투]]에 참가하였고, 여기서 7시간째 교전을 치르다가 얼굴에 총상을 입게 되고 공로메달 'V'와 [[퍼플 하트]]를 받음. 병원에서 회복한 뒤에는 다시 그린베레 제3특전단으로 복귀,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 복무. 1994년 [[아이티]] 쿠데타 사태 당시 파병되었고 이때 계급이 상사였음. 이후 제10특전단의 CIF 특임대에서 복무, [[보스니아 내전]]때 파병되었으며 이때 계급이 원사였음. 2003년에는 제5특전단 제1특전대대 주임원사로써 [[이라크 전쟁]]에 참전. 군에서 전역한 뒤에는 민간계약자로 [[미합중국 특수작전사령부|미 특수작전사령부(SOCOM)]]에서 정보 분석가로 일하기도 하였고, 2017년에는 [[주한미군/구성#s-1.6|주한미군특수전사령부]]에서 일하기도 하였음. 2017년에 미 국방부에서 선정하는 '코만도-명예의 전당', '레인저-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현재는 '글로벌 특수부대(SOF) 재단'의 스탭으로 일하고 있음. [[파일:VC2OPRWEUㅣBWI6S7HAY.jpg]] 기념패를 수여받는 릭 램 퇴역 주임원사. * 마이클 테일러 - 2019년 일본에서 있었던 [[카를로스 곤 구속 사건#s-3.3|카를로스 곤 회장 탈출 사건]]의 기획자. 사설 군사업계에선 '캡틴 아메리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나름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함. 1960년에 군 정보장교였던 아버지와 웨이트리스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고교 졸업 후 육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그린베레에 지원하여 제10특전단에 배치. 제10특전단(유럽 담당) 당시 HALO팀에 있었으며 전술 소형 핵배낭 침투팀에서도 복무함. 1982년 [[레바논 내전]]에 파병되었고, 그곳에서 레바논인 아내를 만남. 전역 이후 개인 회사를 설립하고 미 정부, 주로 [[연방수사국|FBI]]나 [[펜타곤]], [[미합중국 법무부 마약단속국|마약단속국(DEA)]] 또는 개인고객들을 위해 용병, 군사훈련, 인질구출, 경호, 각종 심부름 등을 담당하며 건당 최소 2만달러에서 최대 2백만 달러 이상씩 벌어들였다함. 아내와 연고지가 있는 [[레바논]]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였는데[* 그 당시 레바논은 여행금지 국가], 레바논에서 미국으로 밀수입되던 1억 달러 상당의 마약을 적발하여 몰수하기도 하였고 레바논에서 납치된 민간인을 구출하기도 하였음. 2001년 9.11테러 이후 [[이라크 전쟁]]과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그의 회사의 직원들은 거의 2,000명이 넘었으며, 대부분이 그린베레 출신이거나 정보기관 출신이었음. 그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매년 가을에는 메사추세츠주의 보딩스쿨에서 풋볼 코치를 맡기도 했음. [[시리아]]에서는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숨겨놓은 황금을 찾는 일도 담당했음. 2019년에 과거 이라크에서 만나 친분이 있던 한 레바논 사업가(이 사람이 바로 카를로스 곤 회장의 친구)의 부탁으로 [[일본]]에서 [[카를로스 곤 구속 사건#s-3.3|카를로스 곤 회장의 탈출 사건]]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였음. 참고로 마이클 테일러가 과거 1970년대 후반에 그린베레 Q코스 선발훈련을 받을 당시, 지원자 169명 중에 3명이 최종적으로 통과하여 그린베레가 되었는데, 한명은 마이클 테일러(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훗날 1993년에 [[모가디슈 전투]]에서 전사하여 [[명예 훈장]]을 받은 [[델타 포스]] 저격수인 '게리 고든'이었음. [[파일:im-3626374.jpeg.jpg]] [[카를로스 곤 구속 사건#s-3.3|곤 회장 탈출사건]] 당시 공항 CCTV에 찍힌 마이클 테일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